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른스트 텔만 (문단 편집) == 생애 == [[함부르크]]의 항만노동자 출신으로 1902년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여 활동하다가, 1915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에 징집되어 1918년 독일 제국 패망 시까지 [[포병]]으로 [[서부전선]]에서 복무했다. 이후 1920년 독일 공산당(KPD)에 합류하였으며, 1921년에는 독일 공산당의 대표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3년에는 함부르크에서 무장 반란을 시도하였으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따라 한동안 도피 생활을 하기도 한다. 1924년에는 국회의원, 1925년에는 독일 공산당의 중앙위원장이 되어 당의 대중화를 도모하였다. 같은 해에 독일 공산당의 준군사단체였던 적색전선전사연맹(Roter Frontkämpferbund)의 수장에 오르면서 독일 공산당의 총재직도 겸임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공산당의 후보로 1925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지만 애초에 상대는 [[타넨베르크 전투]] 이후 전 독일의 영웅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였기 때문에 바로 탈락하고 만다. 텔만이 출마해서 중도층의 표를 상당 부분 갉아먹은 덕분에, 힌덴부르크를 위협할 가장 큰 적수였던 [[가톨릭 중앙당]]의 [[빌헬름 마르크스]]가 피를 본다. 하지만 이후 텔만은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저지르는데,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하는) 중도 좌파 세력을 파괴하라'는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지령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1928년 6차 코민테른 대회를 기점으로, 스탈린주의에 충실한 방향으로 공격적, 과격적 노선이 채택되면서 코민테른의 기능도 맛이 가기 시작한 시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한창 세를 불리고 있던 [[나치]]를 견제하지 않고 [[독일 사회민주당]](이하 '사민당'으로 표기) 세력과 전력을 다해 싸우는 근시안적인 행보를 보였고, 이런 [[http://www.pi-news.net/wp/uploads/2012/01/Foto.jpg|만평]]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19년,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준군사조직 [[자유군단]]에 의해 죽었는데, 그때 자유군단을 지휘한 구스타프 노스케(Gustav Noske), 그에게 지시를 내린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모두 사민당 소속이었다. 코민테른의 테제가 아니더라도 사민당과 공산당은 철전지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관계이긴 했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출마한 텔만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 [[아돌프 히틀러]]에 이어 10.2%의 지지율로 3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힌덴부르크의 당선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득표율이었다. 참고로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에 공산당이 내세운 슬로건이 "힌덴부르크를 뽑는 것은 히틀러를 뽑는 것이고, 히틀러를 뽑는 것은 전쟁으로 가는 길이다"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후의 역사]]를 참고.] 그러다가 [[프로이센 쿠데타]] 이후에야 뒤늦게 노선을 전환하여 사민당과 공동투쟁에 나섰지만 그간의 갈등으로 쌓인 악감정이 많았던지라 이는 실현되지 않았고, 뒤늦은 노선전환은 정치적 인생에 종점을 찍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인 1933년에는 히틀러가 총리직에 오른 데 이어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체포하면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텔만을 비롯하여 4천여명의 공산당원들이 방화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며, 텔만 또한 체포되어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 투옥되었다. 수감생활 중이던 1939년 8월, 나치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을 당시 소련 측의 의중에 맞춰 그를 석방하려던 계획이 있었지만 무산되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908270020910103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9-08-27&officeId=00020&pageNo=1&printNo=6472&publishType=00010|#]] 이후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줄곧 갇혀 지내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막판에 독일 패색이 짙어지자 1944년 히틀러에 의해 총살당했다고 전해진다. 나치는 그가 연합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었다. 만약 그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동독의 지도자가 되었을 확률이 높다. 사망 이후 전쟁이 끝나고서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묻힌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펠데 공동묘지의 사회주의자 묘역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